티스토리 뷰
스타필드: 광활한 공허의 미학, 혹은 거대한 가능성의 잔해
토드 하워드와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이름은 ‘오픈월드 RPG’라는 장르와 동의어처럼 여겨져 왔다. 그들의 최신작, 《스타필드》는 엘더스크롤의 판타지 대륙과 폴아웃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황무지를 넘어, 인류의 오랜 염원이었던 우주를 그 무대로 삼았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 이후 명맥이 끊겼던 스페이스 오페라 서사 RPG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스타필드》가 지닌 장르적 가치는 명백하다. 80여 시간의 플레이 타임은 이 광활한 우주가 선사하는 매혹과 그 이면에 감춰진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체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타필드》는 기념비적인 실패작이자,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경험이라는 양가적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문제작이다.
루도스(Ludus)의 영역: 창조와 탐험의 변주
《스타필드》의 가장 큰 성취는 플레이어에게 ‘자기만의 서사’를 구축할 자유를 부여하는 샌드박스적 요소에 있다. 전초기지 건설과 함선 커스터마이징은 단순한 미니게임을 넘어, 황량한 행성에 자신만의 거점을 마련하고, 우주를 유랑할 페르소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창조적 행위’로 기능한다. 이는 게임 세계에 대한 플레이어의 주체적 개입을 유도하며, 몰입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
팩션 퀘스트라인, 특히 ‘크림슨 플릿’의 서사는 전작의 한계를 넘어선 주목할 만한 발전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하여,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관계의 역학을 밀도 높게 그려낸다. 이는 베데스다식 RPG가 지향해야 할 내러티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항성계의 공전 주기나 행성의 자전에 따른 낮과 밤의 변화 같은 천문학적 디테일은 이 세계에 최소한의 존재론적 개연성(ontological verisimilitude)을 부여하려는 야심적인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비록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이러한 세밀함은 《스타필드》의 우주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임을 암시하며 미학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내러티브와 시스템의 불협화음: 깨어진 몰입의 유리창
하지만 이 경외감은 게임의 여러 구조적 결함 앞에서 쉬이 부서진다.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플레이어의 여정을 이끌어야 할 메인 퀘스트 초반부의 심각한 서사적 무기력함이다. 초반 퀘스트는 플레이어에게 ‘왜 이 광활한 우주를 탐험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력한 내적 동기를 부여하는 데 실패하며, 이는 게임 전체의 몰입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한다.
UI(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조악함은 미학적 문제를 넘어 인지적 마찰(cognitive friction)을 유발하는 수준이다. 메뉴와 메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하는 번거로움, 불필요하게 파편화된 정보는 플레이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디제시스(diegesis, 게임의 서사 세계)와 플레이어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벌린다. 잦은 로딩 화면은 이러한 단절을 더욱 심화시킨다. 네온 시티의 한복판에서 퀘스트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수차례의 로딩은, 광활한 우주를 심리스(seamless)하게 탐험한다는 게임의 핵심적 판타지를 정면으로 배신하는 경험이다.
동료 캐릭터들의 평면성은 서사적 깊이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플레이어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기능할 뿐, 입체적인 상호작용의 대상이나 갈등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는 플레이어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세계와의 유기적 관계 맺기를 방해한다.
결정적으로, 《스타필드》의 탐험은 ‘광활함’과 ‘공허함’을 착각하고 있다. 절차적으로 생성된 수많은 행성은 이름만 다를 뿐, 대동소이한 풍경과 반복적인 구조물, 얕은 깊이의 퀘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는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이 보여주었던, 모든 공간이 고유의 역사와 비밀을 품고 있던 유기적 월드 디자인과는 명백히 퇴보한 모습이다. 영하 15도를 ‘극한 환경’이라 칭하거나, 치명적인 방사선과 유독가스가 가득한 행성에서 맨몸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존재는 애써 구축한 세계관의 내적 일관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설정적 오류에 해당한다.
결론: 대체재 없는, 그러나 미완의 오디세이
《스타필드》는 거대한 야심과 기술적, 서사적 한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프로젝트다. 후반부 메인 퀘스트가 제시하는 우주적 비전은 그 디자인 의도를 납득하게 할 만큼 흥미롭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수많은 결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현시점에서 《스타필드》가 제공하는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서사 중심의 RPG, 그리고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창조가 결합된 이 독특한 포지셔닝은 베데스다식 RPG를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여전히 거부하기 힘든 매력으로 다가온다.
결국 《스타필드》는 별들 사이를 항해하는 장엄한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을 담아내기에는 선체가 너무 낡고 허술했던 우주선과 같다. 언젠가 할인 목록에서 이 게임을 발견한다면, 그 미완의 가능성과 명백한 한계를 모두 인지한 채 여정을 시작하길 권한다. 그곳에는 분명 매혹적인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의 공허함 또한 감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G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더스 게이트 3 한글 폰트 변경 모드 (리디바탕) (8) | 2023.08.19 |
---|---|
더 위쳐 3 한글 폰트 변경 모드 (14) | 2018.02.14 |
어쌔신 크리드 2 무선 엑스박스 패드 컨트롤러 사용자 패치 (4) | 2014.03.09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