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힘,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빛과 어둠의 회화, 클레르 옵스퀴르
미술사에서 클레르-옵스퀴르(Clair-obscur), 혹은 명암법(Chiaroscuro)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극적인 회화 기법을 지칭한다. 카라바조와 렘브란트가 사랑했던 이 기법은 화면의 대부분을 깊은 어둠 속에 잠기게 한 채, 단 하나의 광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으로 주제를 극적으로 조명한다. 빛과 어둠의 첨예한 대비는 단순히 형태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물의 내면적 고뇌, 신성한 계시의 순간, 혹은 운명적 사건의 비장미를 응축하여 관람자의 정서에 직접적인 파문을 일으킨다. 프랑스의 신생 개발사 Sandfall Interactive가 선보인 첫 작품,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바로 이 예술적 개념을 게임의 이름이자 핵심적인 미학적 원리로 삼는다. 이 작품은 과연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게임 서사와 경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가?

누군가에게 ‘인생 게임’이란, 종종 엄청난 기대 속에서 만나기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우연히 접했을 때 탄생하곤 한다.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이하 클레르 옵스퀴르)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바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OpenCritic 스코어라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보고 구매했기에 예기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와 마주할 때마다 그 감동과 놀라움이 훼손되지 않고 오롯이 전달되었다. 이처럼 기대치 없이 맞이한 서사의 변곡점들은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고, 왜 때로는 무지가 최고의 감상 조건이 되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만큼은, 어쩌면 당신의 ‘인생 게임’이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으로, 가급적 사전 정보 없이 직접 부딪혀보길 권하고 싶다.
고전적 형식미와 현대적 역동성의 조우
《클레르 옵스퀴르》는 그 골격을 고전 JRPG의 친숙한 형식 위에 세운다. 월드맵을 탐험하고, 적과의 조우 시 별도의 전투 페이즈로 전환되며, 턴을 기반으로 명령을 주고받는 구조는 장르의 오랜 팬들에게 안정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작품의 서사가 뿌리내릴 수 있는 견고한 토대이자, 개발사가 장르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지니고 있음을 방증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과거의 유산을 답습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클레르 옵스퀴르 기법처럼, 정적인 턴제 전투와는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실시간 액션을 과감히 도입했다. 공격 시점에 맞춰 추가 입력을 가하는 QTE 시스템과 적의 공격에 맞춰 실시간으로 반응해야 하는 회피 및 패리(Parry)는 턴제 전투라는 정적인 프레임에 역동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정교한 사고를 요하는 전략적 깊이와 찰나의 순간에 반응하는 감각적 쾌감을 결합하려는, 장르의 변증법적 진화를 향한 야심찬 시도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플레이어는 더 이상 수동적인 명령 하달자가 아닌, 전투의 흐름을 직접 조각하는 행위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실재감을 조각하는 시청각적 미장센
오랫동안 JRPG 장르는 추상화된 세계와 전투 표현으로 인해 플레이어에게 ‘실재감’을 전달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보여왔다. 《클레르 옵스퀴르》는 이러한 장르적 관성을 탁월한 시청각적 연출로 극복한다. 이야기의 주요 분기점마다 삽입된 고품질의 실시간 렌더링 컷신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시네마틱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최종보스전에서 보여준 현란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그리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과잉되게 사용된 보케(bokeh) 효과는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과시를 넘어, 장면의 극적 깊이와 미학적 밀도를 증폭시키려는 명확한 연출적 의도의 발현이다. 마치 잘 계산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러한 연출은 플레이어의 정서에 직접 호소하며 감정적 몰입의 심도를 극대화한다. 여기에 작품 전반을 감싸는, 건반 악기의 섬세한 선율이 돋보이는 유려한 OST는 게임의 서정적이면서도 비장한 세계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각 장면의 정서적 설득력을 완성한다.
쾌감과 피로의 아슬아슬한 경계
하지만 실시간 액션의 도입이라는 야심찬 시도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투에 활력을 불어넣은 동시에, 플레이어에게 상당한 수준의 숙련도를 요구하며 때로는 좌절감을 안긴다. 특히 회피와 패리는 보통 난이도에서조차 전투의 핵심인데, 이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적의 패턴을 ‘맞아가면서’ 체득하는 고통스러운 학습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문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 학습 과정이 쾌감보다 불쾌감으로 다가오는 구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엇박자 공격, 불분명한 피격 판정, 그리고 지나치게 긴 전투 호흡은 플레이어의 피로도를 누적시킨다. 이는 전투 경험의 균형을 해치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위대한 힘
이러한 몇 가지 흠결에도 불구하고 《클레르 옵스퀴르》를 끝까지 붙들게 만드는 힘은 단연 압도적인 서사에 있다. 다음 이야기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 때문에 새벽까지 게임을 끄지 못했던 경험은, 잘 짜인 이야기가 주는 원초적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이 견고한 내러티브의 힘은 앞서 언급한 시스템적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으로 기능한다.
결론적으로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기꺼이 감내할 만한 상처를 지닌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는 고전적 형식에 대한 경의와 현대적 혁신을 향한 야망이 충돌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루는, 흥미로운 실험의 장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잘 짜인 이야기가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여전히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우리 시대의 귀중한 서사시로 기억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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